전 남친 현 남편과 연애, 결혼을 포함 함께한 시간을 모두 더해보니 이제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찌그락빠그락 하면서도 티비를 볼 땐 나란히 앉아 팔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성이 풀리는 걸 보니 아직 서로에게 덜 당한게(?) 분명하다.

 

 

사람들에게 남편이 외국인이라고 하면 신기한 듯 여러가지 질문을 한다. 내겐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하고 정의를 내리며 사는 게 아니다보니, 늘 한 두가지 피상적인 이야기로 대응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참에 새 글 쓰기 버튼을 누르고, 빈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몇 가지 정리해봤다.

 

 

폴란드 전통요리, 피에로기. 시큼한 크림과 함께 먹는다.

 

 

 

1. 언어

갈등이 생기거나 어려운 부분이 있으면 머리가 지끈거리더라도 외국어로 대화해서 푼다. 기본적인 예의로 화가 나도 남편이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는 쓰지 않는다. 둘 다 영어가 편하다는 장점도 있고, 함께 한 시간이 워낙 길다보니 폴+영+한이 합쳐진 요상한 제 3의 언어까지 만들어 사용한다. 궁하면 통한다고, 다년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생존전략이다. 누가 우리 다투는 걸 듣기라도 한다면, 저게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야?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가끔 남편네 가족행사나 폴란드 부부동반 모임에 함께 참석할 때가 있다. 아무리 외국어전공자라도,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배경 이해가 필요한 깊은 의미의 단어나 슬랭 - 예를 들어 경찰을 비하하는 한국말로 짭새라는 단어가 있듯, 폴란드에서는 bagieta 바게트라고 부르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 을 완벽히 따라갈 수 없다. 이럴 땐 남편이 이해가 되냐고 물어봐주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바꿔서 정리해 준다. 이럴 땐 외국어 자부심이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면서, 아마 이런 한계는 평생이 걸려도 극복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같이 영화나 유튜브를 볼 땐 영어자막으로 통일한다.

 

 

2. 밥

어느 한쪽이 엄청난 편식가가 아니라면 조정기간을 거쳐 결국엔 밸런스를 찾게 된다. 한국에서 외식할 때 먹는 서구식 식단은 달고 짜고 느끼하다보니 그런걸 어떻게 매일 먹나 할 수도 있지만, 한식이 그렇듯 유럽 집밥 역시 신선한 재료로 다양하게 조리하여 건강에 좋고 속이 편안하다.

 

다행히 남편은 한국음식을 크게 가리지 않는다. 깔끔한 국물을 즐기는 음식, 예를 들면 콩나물국, 생선국, 미역국 같은 건 밍밍해서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이런 종류만 제외하면 무엇이든 잘 먹는다. 나 역시 유럽식 훈제먹거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 정도로 둘다 무던한 입맛이라 할 수 있겠다.

 

차이점이라면 여긴 감자를 엄청 많이 쓴다는 것 정도일까? 

프랑스라고 하면 슈퍼마켓에서 바게트가 튀어나온 종이백을 안고 나오는 모습이 으레 상상되듯, 여긴 자전거에 10Kg 짜리 감자포대를 싣고 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Kopytka 코피트카 라고 이탈리아 뇨끼 비슷한, 감자에 밀가루를 소량 섞어 계란과 반죽한 뒤 끓인 물에 데쳐내는 옹심이 같은 요리가 있는데 정말 맛있다. 감자 2Kg로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둔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분간 다시 만들 계획은 없지만, 다음 번 대량생산 땐 사진도 몇 장 찍어 올려보도록 하겠다.

 

코피트카, https://aniagotuje.pl/przepis/tradycyjne-kopytka-z-bulka-tarta

 

 

요리하는 걸 워낙 좋아해서 폴란드 요리책도 여러 권 사다놓고 이것 저것 시도하다보니 (말도 안되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는 시어머니가 만드신 수프보다 내 수프가 더 맛있다는 입에 발린 칭찬을 듣기도 한다. 

 

 

3. 일과 가족에 대한 우선순위

이 부분은 많이 융화되었지만, 아직도 맞춰가고 있는 부분이라 위 두 예시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유럽인 남편은 일은 철저히 가족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있는 건 우리 인생과 가족이라고 말한다. 돈과 커리어가 가족의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다고 믿는다. 그럼 K-노예근성이 낭낭한 내가 아무리 그래도 높은 자리에 한번은 올라봐야 하는 것 아니냐, 야망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따지고 들어도, 유럽인들 대부분이 매우 가족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은 충성심이 낮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 회사가 개인 삶을 배려하고 밸런스를 보장한다면, 한 회사에서 20년, 25년씩 근무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것 역시 애사심과 책임감의 방증이다.

 

그런 맥락에서 내가 홈오피스를 하는 날, 16시가 넘어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면 당장 마무리하라고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다. 회사와 내가 계약한 근로시간에 대한 의무를 다 했다는 명목이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나도 날 가만히 놔두면 저녁까지 메일 읽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나름 순응하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너무 급한 일인데도 잔소리를 해대니 이건 이대로 스트레스 받을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녁 늦게 나 블로그에 포스팅할 글 쓸거야 하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면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며 기꺼이 응원해준다. 이건 온전히 널 위한 일이니까 열심히 해봐. 하고.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는 말이 떠오른다.

모두가 세상을 보는 본인만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다 인생의 반쪽을 만나면 상대의 가치관을 저항없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대화를 통해 내 것을 설득하기도, 마찰을 매개로 새로운 결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국제커플이든 아니든, 전 세계 누구라도 비슷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 그 안에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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