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먹고 중국어, 점심 먹고 중국어, 저녁 먹고 두말 필요없이 다시 중국어 공부하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과 두 사촌은 베이징 육도구에 있는, 층고가 아주 높은 아파트에 살았다. 층고가 어찌나 높던지 천장 구석에 생긴 거미줄을 없앨 수도 없을 지경이었지만 집에 오래 있어도 갑갑하지 않아 참 좋았다.  그때의 영향인지, 난 여전히 천장이 높은 유럽집을 좋아한다.
첫 해외 생활이니, 모든것이 그저 새롭고 신기했다.
 


아파트 뒤쪽엔 작은 상가건물이 있었는데, 아침마다 돼지고기와 채소속이 든 달큰한 빠오즈 만두 찌는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길거리엔 신장에서 온 아가씨들이 담요를 깔아놓고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팔았고, 몇 백그람인가 사면 꼭 조금씩 더 얹어주던 유명한 오도구 대추빵도, 하나 먹으면 속이 든든한 찌엔삥 맛도 아직 생생히 기억난다. 그땐 다들 현금을 썼는데, 요즘은 거지들도 큐알코드로 구걸하는 시대라 하니 시간 흘러가는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https://niubibeijing.tumblr.com/post/142059884295/the-best-date-cakes-in-town-is-closing-t-t-in-two  오도구 줄서서 먹던 대추빵. 아, 벌써 7년 전에 문을 닫았구나..

 

 

 

공부는 순조로웠다. 북경어언대학교 우리 반엔 네덜란드, 러시아, 일본, 인도네시아, 태국 학생들이 함께 모여 공부했다. 그 중에는 부모님 중 한 쪽이 중국인이라 뿌리를 찾아 왔다는 혼혈인도 있었다. 학교수업을 성실히 듣는 건 물론, 동생 수학공부를 봐주던 중국인 과외선생님 천하오에게 영어 스피킹을 봐 줄 테니, 나와 중국어회화를 연습하자고 졸랐다. 그는 외지사람으로, 머리가 좋아 북경으로 상경하여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까지 중국 안에 흠뻑 빠져있으니, 중국어 실력은 날로 늘어갔다.

 

 

여기저기 여행도 많이 다녔다. 만리장성, 이화원, 자금성 등 엄청난 스케일과 다채로운 역사를 자랑하는 장소도 충분히 그 매력이 있지만, 내몽고에서 본 고비사막 밤하늘의 별은 평생 가져갈 몇 안되는 기억으로 남았다. 하늘을 커튼처럼 걷은 뒤 탁탁 털면 그 큰 별들이 그대로 쏟아져내려, 하나 하나 주워담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몽골식 유르타에서 자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유럽 에어비앤비를 구경하다보면 경치 좋은 산 중턱에 a la 유르타를 짓고 하루 숙박비를 20만원씩 받는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데, 그때마다 내몽고를 생각했다.

 

 

 

 

그렇게 10개월 정도를 공부한 후, 나는 목표했던 대로 HSK 5급을 취득했고 중국어 회화가 편해졌다. 뜻한 바를 이루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마냥 쉴 수는 없었다. 졸업 및 취업이란 허들이 목전에 버티고 있었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취업이라는 고난길을 상상하지 못했고, 중국에서 이룬 작은 성취에 취해 헤롱거리고 있을 때였다.

 

 

 

(4)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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