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유럽 특수어과, 폴란드어과에 진학했다. 스무살, 너무도 파릇한 단어지만 현실의 난 여전히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해 빠졌고, 멍청했으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부모님께 용돈을 타 써야했으나 집을 떠나 대학생이 되었다는 이유로 어엿한 성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잔뜩 취해있었다.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동기라 해도 40명 남짓했던 걸로 기억한다. 
전공수업 첫 수업엔 금발의 원어민 교수님이 들어오셨는데, 우리가 a b c도 모르는 상태라는 걸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당신 나라 언어로 솰라솰라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한참을 뭔가 말씀하시는 교수님께서는 시종일관 싱글벙글 웃고 계셨지만, 내 머리 위로는 분명 "?????"이 떠 올랐을 것이다. 그 교실에 앉아있었던 모든 신입생도 벙찐 채로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때, 교수님께서는 칠판에 엄청 크게 다음과 같이 쓰셨다.

Jak się masz?

(약 솅 마쉬?  : 너 어떻게 지내? How are you doing?)

 
e 밑에 저 꼬랑지는 뭐며, s와 z가 어떻게 같이 붙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정말 진지하게 세상에 저런 언어는 없고 이건 학비 대사기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내 전공공부의 시작이었다.
 
 
 
1년의 공부를 마치고 나면 어느 정도 전공을 계속 가지고 갈 사람과, 도저히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복수전공 등을 통해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하는 사람으로 나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비율이 반반 정도는 되었던 것 같은데, 그 만큼 배우기 어려운 언어였던 탓이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중 전자, 즉 전공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으레 다음 학기엔 폴란드로 교환학생을 갔다.
 
폴란드 몇 개 대도시에 위치한 자매결연 대학교에서 한~두학기를 수료하면 본 대학교에서 공부한 것 처럼 학점을 인정해주는 제도였다. 실제로,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언어에 충분히 노출되는 것이다. 언어를 빨리 배우려면 그 나라 남자친구/여자친구를 만나라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폴란드에서 생활하며 1년이나마 배운 걸 직접 써본다는 건 언어전공자에겐 좋은 기회였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폴란드에서 얼마간 생활해 본 뒤 돌아오면 그 나라에 대한 언어적, 문화적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전공공부도 수월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기왕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고, 돈도 시간도 이만큼이나 투자했으니 일단 칼을 뽑았으면 일반 두부는 못해도 연두부라도 썰어보자는 마음이었던 내게도 이 역시 충분히 매력적인 옵션이지만, 오랜 고민 끝에 다른 결심을 내렸다. 1년 휴학 후 중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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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중국어에 대한 기업선호도가 높아지면서 중국어 자격증 공부, 중국 유학 열풍이 뜨겁기도 했고, 내 경우엔 어머니와 남동생이 중국대학교 진학을 목표로 베이징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최대한 사용해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누구나 때와 조건에 맞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그 일련의 선택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역시 선택의 문제였다. 해외에 유학 중인 가족이 있더라도, 폴란드로 어학연수를 가는 옵션, 혹은 한국에 머무르며 졸업에 집중하는 옵션 역시 그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혼자 한국에 남겨두고, 1년 간의 중국유학길에 올랐다. 거창하게 세운 목표는 중국어 회화 정복, HSK자격증 취득이었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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