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인가 지나고 사무실이 조용한 어느 오후, 비서분을 통해 면담을 요청드렸다. 제안을 받았으니 회답을 할 차례였다.
권위와 직책에 맞는 정갈한 사무실로 들어섰다. 큰 프로젝트에 띄워진 복잡해보이는 프레젠테이션은 그 중압감을 더했고, 바쁘신 분이니 할 말은 간결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생각은 좀 해봤니 하는 말에 요약하자면 '저를 알아봐주시고 좋은 제안을 해 주셔서 감사하다, 생각을 많이 해 보았으나 저와는 맞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정도로 대답했다.
흠, 하고 어느간 말씀이 없었다. 그 분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 지 내가 알 길은 없다. 다만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하는 목소리가 머리 속에 울려 퍼졌다. '너 야망있는 줄 알았더니 한참 잘못 봤구나', '이게 어떤 기회인지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네' 하는, 내 결정을 조롱하는 듯 한 소리 말이다.
이래서 선택을 내릴 때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먼저 여러 선택지를 눈 앞에 쭉 펼쳐놓은 다음 각 장단점이 뭘까, 과거의 나는 비슷한 결정에 어떤 후회를 했던가, 미래의 나라면 이 결정에 만족할까, 이 선택으로 인해 어떤 문이 열리게 될까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충분한 시간과 스트레스가 필요한 일이다. 다만, 장고 끝에 내린 나의 결정에 대해서는 완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현재의 나에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확신을 주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머리 속 소리를 물렸다.
곧 잘 알겠다며,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나 하자고 하신다. 지금 속해있는 팀 말고, 인력 보충이 급히 필요한 팀이 있으니 그 쪽으로 부서변경을 해 달라는 말이다. 직접 하신 말을 빌어, "깡패가 협박하는 것 처럼 보일 지 모르겠지만 이 부탁은 꼭 들어줘야겠다." 새로운 업무는 말하자면 SCM 관련으로, 내 경력과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부서를 옮기면서 구매관리 직책에서 물러났다. 자연스럽게 묘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협력사 관리업무 역시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게 되었다.
두어 달 시간이 다시 흘렀다. 어느 날,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때 만났던, 키가 큰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오랜만이야, 부서를 옮겼다고 들었는데 잘 지내?
반가운 마음에 잘 지낸다며, 새로운 일은 이러이러한데 아직 배워가는 중이다라고 회신을 했고 몇 차례 잡담을 했다. 나도 그쪽 일은 손을 놓은 지 한참 되었기에 새 담당자와 업무보는 건 어떤지, 혹시 나보다 더 잘하는 건 아닌지(?) 농담도 했다. 매니저는 문득 본인이랑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냐며, 지금은 어떤 생각인지 알고 싶다고 했다. 반년도 지난 일이었다.
주어진 길을 걸어가던 나는 또 다른 선택의 갈래 앞에 다다랐지만 이번엔 어렵지 않았다.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마치 원래 그렇게 될 일이었던 것 처럼 그러고마하고 답했다.
예전에 머리 속에 울려퍼졌던 소리들이 다시 떠올랐다. 야망있는 줄 알았더니, 어떤 기회를 발로 차 버리는 지 알고 있냐는 조롱들은 따뜻한 봄 햇살에 눈 녹듯 사라졌다. 내게 있어 진짜 야망과 기회는 더 큰 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업무를 영어로 처리해야 하고, 여태 했던 업무들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새로운 기업 문화에 뛰어들어야 하고, 글로벌 팀원들 사이에서 나 자신의 쓰임을 증명해야 하는 더 도전적인 조건이라 할 지라도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5)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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